소개
김서연은 아픈 마음을 누르며 이름을 적었다.
그가 그 첫사랑과 이름을 나란히 올리던 바로 그날, 그녀는 차에 부딪히는 큰일을 겪었고, 뱃속 두 아이의 숨이 멎었다. 그날 뒤로 그녀는 쓰던 번호를 모두 지우고 그의 온누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나중에 들려온 말로는, 강태준은 새 색시마저 내팽개치고, 허지양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를 찾아 온 세상을 떠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만난 날, 그는 그녀를 차에 가두다시피 하고는 무릎까지 꿇고 빌었다. "서연아, 제발... 딱 한 번만 봐주라."
챕터 1
고요한 밤이었다.
김지연은 심란한 마음에 잠을 설쳤다. 계속해서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를 했다.
허리에 손길이 느껴지자, 그녀는 일부러 침대 가장자리로 몇 인치 몸을 옮겼다. 잠이 들려던 찰나, 다시 끌려 돌아왔다.
김지연은 고집스럽게 다시 몸을 피했지만, 남자는 그녀를 강하게 품 안으로 눌렀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남자의 정복욕은 그녀로 인해 성공적으로 깨어났다. 허리에 있던 손은 더 이상 얌전하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지연은 완전히 잠에서 깨어, 그의 탄탄하고 힘 있는 팔을 붙잡고 밀어내려 애썼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저 오늘 정말 싫어요.”
결혼 3년 동안 순종, 고분고분함이 그녀의 대명사였다. 그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강태준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몸을 뒤집어 그녀 위로 올라탔다. 옷깃을 헤치고, 그의 거친 입맞춤이 동그란 어깨를 따라 번져나갔다.
저항은 소용없었다.
김지연의 눈빛은 텅 비었고, 온몸이 마비된 채 그의 난폭함을 견뎌냈다. 눈물은 마치 수문이 열린 듯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오직 어둠 속에서만 그녀는 눈물이 마음껏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
몇 시간 전, 김지연은 강태준의 여동생에게 물건을 전해주러 클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당했다.
두 명의 괴한은 그녀의 명품 가방, 액세서리, 심지어 지갑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직 결혼반지만 빼앗고는 그녀를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가 폭행하려 했다. 재물을 노린 강도라기보다는 계획적인 성폭행에 가까웠다.
마침 경찰이 지나가지 않았다면, 오늘 밤이 그녀의 제삿날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갈기갈기 찢어진 옷을 여미고 길가에 쭈그려 앉아 떨면서 강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교태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준 씨 지금 씻고 있는데, 무슨 일이에요?”
목소리는 나른하고 달콤했으며, 묻는 동시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듯했다.
휴대전화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물소리는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았다. 김지연은 그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용히 휴대전화를 집어넣고 가로등 아래에서 목놓아 울었다.
이 목소리는 김지연에게 낯설지 않았다. 윤진아, 강태준이 마음속 깊이 품고 있는 사람.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전화를 끊자, 윤진아에게서 도발적인 메시지가 왔다. 사진 한 장과 함께 간단한 한 문장이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쪽이 불륜이지.】
사진을 확대하자 초음파 사진이었다. 임신 6주, 아기집이 선명하게 보였다.
한 달여 전, 강태준이 M국으로 일주일간 출장을 갔던 때와 시기가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분명 그들의 아기를 무척 기대하고 있겠지.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닥쳐와 김지연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를 구해준 경찰관이 했던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그 두 사람, 사주를 받은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누가 시켰는지는 아직 심문 중입니다. 혹시 누구에게 원한 살 만한 일이라도 하셨습니까?”
김지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체 누가 자신을 해치려 하는 걸까? 집 밖에 잘 나가지도 않는 가정주부인 자신이 누구에게 원한을 샀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을 이토록 증오할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김지연은 생각에 잠겨 멍해졌다.
심장이 아프다 못해 마비될 지경이었다.
강태준의 힘이 조금 더 거세졌다. 마치 그녀의 딴생각을 벌주는 것 같았다.
“진아가 귀국했어. 마침 우리 계약도 거의 끝나가니, 시간 잡아서 이혼 절차 밟자.”
그 말을 그의 입으로 직접 듣자, 김지연의 심장이 격렬하게 수축하며 숨이 멎을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가 이 관계를 끝내자고 할 줄은 알았지만, 이런 상황일 줄은 몰랐다.
가장 은밀한 행위를 하면서, 다른 여자와의 이야기를 나누다니.
사람을 죽이고 마음까지 베어버린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걸까.
강태준, 사람의 마음은 풀이나 나무가 아니야. 나도 마음이 있다고.
김지연은 그의 아래에서 참을 수 없이 떨었다. 그녀는 목소리가 메이지 않도록 애쓰며 말했다.
“그럼 축하해요. 사랑하는 사람과 마침내 맺어지게 됐네요.”
어둠 속에서 김지연은 젖은 눈가로 진심 없는 축복을 건넸다. 역시, 한 사람을 사랑하면 먼지처럼 비굴해져 꽃을 피우게 되는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 김지연이 눈을 떴을 때 침대에는 이미 강태준의 모습이 없었다.
그는 초인적인 자제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밤에 몇 시에 자든 아침에는 정시에 일어나 운동하고, 아침을 먹고, 뉴스를 봤다.
마치 정해진 프로그램이 설치된 기계 같았다.
김지연이 간단히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텔레비전에서는 아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어젯밤 보화로에서 일어난 성폭행 미수 사건에 대한 내용이었다.
강태준은 작은 식당에 앉아 있었다. 검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려 근육 라인이 매끄러운 팔뚝이 드러났다. 직각 어깨가 셔츠를 팽팽하게 만들었고, 그 모습은 마치 각진 그의 성격처럼 그녀에게 단 한 줌의 온기도 베풀지 않았다.
그는 왼손에 경제 잡지를, 오른손에는 막 만든 샌드위치를 들고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끔찍한 뉴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온몸에서 타인은 접근하지 말라는 금욕적이고 냉담한 기운이 풍겼다.
가사도우미 유 아주머니가 김지연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사모님, 오늘 우동 드실래요, 만두 드실래요?”
김지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아무거나 괜찮아요. 그리고 유 아주머니, 앞으로는 그냥 김지연 씨라고 부르시는 게 좋겠어요.”
유 아주머니의 미소가 얼굴에 굳었다. 그녀는 그 말의 깊은 뜻을 헤아리려 애썼다. 시선이 강태준과 김지연 사이를 오갔지만,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마음대로 하게 둬요.”
강태준이 차갑게 한마디 툭 던졌다. 시선은 손에 든 잡지에 고정한 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식사를 반쯤 했을 때, 강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 1분 후, 그는 이혼 합의서 두 부와 수표 한 장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이거 사인해. 수표 금액은 원하는 대로 적고.”
김지연은 순간 멈칫했다. 고개를 들자 흑요석처럼 깊은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강씨 주얼리 그룹의 후계자이자, 경시의 경제 명맥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재계에서 거침없이 활약하며 누구에게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려 했고, 그에게서 사랑을 구걸하려 했다.
정말이지 우스운 일이었다.
김지연은 펜을 들어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내용 한 글자도 읽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언제 서류 정리하러 갈까요?”
그녀가 물었다.
강태준의 눈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그렇게 서두르는 건가?”
김지연은 만두를 한입 베어 물었다. 밀랍을 씹는 것 같았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마음속은 감정이 들끓어 억누르고 있던 거센 파도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숨결마저 떨려왔다. 그녀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당신이랑 윤진아 씨 방해될까 봐요.”
강태준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합의서를 다시 가져가 ‘갑’의 자리에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듯 자신의 이름을 휘갈겼다.
“네 민준 오빠나 빨리 찾아가고 싶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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